2022.9.4.
고린도전서 2:1-5
고린도를 포함한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는 도시들에는 소피스트라는 변론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도시들을 방문하여 세련된 화술과 철학적/논리적 연설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그 만큼 더 높은 수강료를 받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커리어를 쌓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 가운데서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고,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였지만(고전1:22),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 세우길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고전2:2).
고등교육을 받은 사도 바울이 소피스트들처럼 멋진 연설을 했으면 자신과 교회를 더 널리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참다운 능력과 지혜가 어디에서 그 근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능력이 뛰어난 화술이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룰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이세계의 사람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 바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떠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고난을 이겨냈을까?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 그의 비결이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 활약한 가장 파워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 조차도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두려워서 도망하고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기까지 하였다(왕상19:2-4). 그렇다면 우리 삶에 두려움이 닥쳐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세상의 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시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살전1:5-6, 고전2:4). 즉, 우리들 자신이 바로 복음의 증거이자 예수님의 편지인 것이다 (고후3:3). 실제로 우리는 최근에 가진 형제 리트릿을 통해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샘솟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였다. 리트릿에 참석한 형제들의 간증을 통해서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될지언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보여준 좋은 예가 아닐까? 세상의 룰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만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법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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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않기로 (따르지 않기로) 작정한 세상의 룰은 무엇인가?
나의 삶 가운데 혹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뀜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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