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8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몰든에 있는 회중 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뛰어난 수재였던 그는 16세에 대학에 입학하였고,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학교에 다니며 이신론자(신을 세상의 창조자로 인식하지만, 인격적이면서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였던 제이콥 임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목표를 거리낌 없이 추구하였고,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두 권의 책을 쓰는 등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삶을 사는 듯했으나, 스스로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p.62) 젊은 아도니람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임스가 자신 있게 휘두르는 논리의 낫은 어둠 속에서 엉켜 자라나고 있던 낡은 교리의 줄기를 끊어버렸고 밝은 햇빛을 비췄다. 이제 모든 것은 훨씬 간단해 보였다. 명예를 얻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가 되었고 야망은 고무되었다.
부모님과의 갈등 속, 극작가가 될 생각으로 연극무대를 경험해보고자 뉴욕으로 떠났으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그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 우연하게 한 여관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가 얻은 방 옆방에는 다 죽어가는 병에 걸린 남자가 묵고 있었다. 칸막이 너머로 들려오는 여러 잡음을 들으며 옆방의 남자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자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여관주인에게 옆방 남자의 상태가 어떠한가 묻자, '죽었다'고 대답했고, 그 남자는 바로 아도니람의 친구였던 제이콥 임스였다. 이 사건으로 아도니람은 큰 충격을 받고, 성경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p.78) 하지만 만약 임스가 틀렸다면? 성경이 글자 그대로 사실이고 하나님이 정말로 실존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제이콥 임스는 이미 가장 절망적인 의미에서 소멸된 것이다. ...그날 밤, 지옥이 그 여관에서 입을 쩍 벌려 사랑하는 친구이자 안내자였던 제이콥 임스를 옆 침대에서 앗아갔다는 사실은 결코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란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아도니람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갖고 계신 목적을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회심한 아도니람은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자신이 미래에 어떤 형태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인 목회자 뷰케넌 박사가 인도에서의 복음전파에 관해 설교한 설교지를 통하여 동방 미전도 종족에 복음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시작으로 1812년, 아내 낸시와 함께 미국인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인도행 배에 승선한다. 인도 캘커타에 도착한 후, 그는 윌리엄 캐리를 만나 버마(현재 미얀마)와 인도에서의 선교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시 버마는 독재정치와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인 불안, 폭동, 선교사들의 핍박과 박해 등 선교 전망이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떠나고, 윌리엄 캐리의 아들 펠릭스 캐리만이 남아있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 말레이반도의 페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으나, 인도 체류 중인 미국 국적자들에 대한 추방 명령에 따라 급하게 빨리 떠날 수 있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 배의 목적지가 바로 버마의 랑군이었다. 아도니람과 아내 낸시는 버마에서 선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기고 버마로 향하게 되었다.
(P.256) "마드라스에 있는 모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오직 하나님께 내어 맡긴 채 6월 22일 배에 올라탔다."
버마에 도착한 그들은 매일 열두시간씩 버마어를 배워갔다. 그들이 아는 다른 언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언어체계 때문에 배움이 더디고 힘들었다. 이때의 답답함을 아도니람의 아내 낸시는 '나는 버마어가 능숙하지 못해 그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이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할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일상적인 대화에는 익숙해져 갔지만, 버마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관념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이뿐 아니라, 열대성 열병과 같은 건강의 문제와 아이의 죽음 등의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인내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복음을 전하는 7페이지의 소책자를 천 부가량 인쇄하여 나누어주었고, 불교도들이 가르침을 받고, 묵상하는 공간이었던 '자얏zayat'을 보고 기독교인을 위한 자얏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자얏을 만든 지 한 달 후에, 마웅나우(Maung Naw)라는 청년이 복음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1819년 6월, 버마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6년만에, 첫 세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P.280) 우리는 종교적인 대화를 할 때 이들의 언어가 종교 용어를 표현하기에는 단어가 부족하여 아주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처음과 끝이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의 신들은 짐승에서부터 여러 단계의 윤회를 거쳐 신이 된다. 버마인들에 의하면 그 신들이 하늘에 가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해탈에 이르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완전하고 지고한 상태였다.... 또 그들은 승려들이 지키는 탑에 예물을 드리는 것 외에는 죄 사함의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낮은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법을 알게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핍박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구하기 위해 버마의 황제를 알현했으나 거절당하고, 영국과 버마간의 전쟁이 시작되자 간첩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은 좁고 습했으며, 간수들은 죄수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였다. 그의 어린 딸 마리아는 굶고 있었고, 아내 낸시는 열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아도니람은 죽음만을 기다리며 매일 매일 끊이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과 치욕을 견뎌야 했다.
(p.463) 감옥은 하나의 커다란 방이었는데 너비가 9미터 길이라 12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고 작은 문 하나만 있었다. 틈 사이로 한 가닥 가는 빛이 들어왔다. 적어도 50명의 죄수가 티크목재로 된 바닥에 거의 벌거벗은 채 족쇄를 차고 있었다.
(p.517) 감옥에 들어온 날을 아무도 몰랐기에 그들이 언제 떠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은 엉켜 있었고 눈은 공허했으며, 몸뚱이는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오물로 더러워지고, 낡아서 해어진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몹시도 더운 계절이었다. 기온은 섭씨 42도 이상이었고, 태양은 머리 바로 위에서 작렬했다. 아도니람은 무척 아팠다. 그날 아침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발바닥은 물집으로 가득했다.
약 1년 6개월간의 감옥생활 끝에 풀려나게 되지만, 결국 아내와 아이는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런 아픔 속에 절망하면서도 계속 사역을 이어나가, 1840년 1월 31일, 번역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버마어 성경을 완성하였다. 아도니람과 그의 제자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나누어주는 동안,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책을 나누어주지 않음에도 진리를 찾으려는 영혼들이 책을 달라고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두세 달 동안 여행을 해서 와서 영원한 하나님에 대해 얘기해주길 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어-버마어 사전을 쓰는 등, 버마의 선교를 위하여 살다가 1850년 4월 6일, 62세의 나이로 배 위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p.627 '내가 드디어 이루어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마지막 장을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일을 하는 데 들인 노력에 오점을 남기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과 장래에 발견될 실수와 불완전을 제거하도록 노력하게 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나는 이 번역물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맡기고, 부디 그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 쓰임 받도록 헌정했다.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주시는 언어가 버마어에 완벽하게 맞아 모든 버마인들이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해주소서, 아멘)
'아도니람 저드슨'은 PSP훈련중 강사님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셔서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미국인 최초의 선교사로, 미얀마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교사님이셨다. 회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언니가 미얀마 출신이라, 더 관심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아도니람의 출생부터 자라나는 과정, 젊은 시절의 열정이 넘치지만 부족했었던 모습부터, 자녀들과 아내의 죽음앞에 좌절하는 모습, 통찰력 있고 겸손한 모습까지, 한 사람의 삶의 흐름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내면의 갈등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더 공감하며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치열하게 진리를 따라 살고자 했던 그가 겪은 사건들에서, 타국에서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위험을 떠안고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선교사의 삶에 비해 아도니람이 겪은 삶은 너무나 치열하고 고통이 가득했다. 타국땅에 산다는 것만으로, '나는 선교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벼운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선교사로 산다는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각오를 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역중 미국에 잠시 돌아갔을 때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데,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살아있는 전설적 인물로 대했다. 설교강단에 선 그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대단한 간증을 기대했으나. 아도니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우리가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에 관해 얘기했을 뿐이었다. 아도니람이 겪은 어떤 경험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p.706) 그가 설교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가장 눈치가 없는 사람의 눈에조차 거기 모인 청중들이 실망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난 뒤, 몇 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왜 저드슨 박사가 그 밖의 다른 이야기 즉, 모험담을 들려주지 않았는지 솔직하게 물어왔다. 집으로 가는 도중 나는 그 말을 전했다. '그럼 그들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소?' 그가 반문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내 최선의 능력을 다해 그들에게 소개했을 뿐이오.' '그러나 그들은 무언가 다른 것, 즉 모험담을 듣고 싶어했어요.' '글쎄, 나는 그들에게 모험담을 이야기했다고 확신하는데.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전율한 만한 모험담을 말이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전에도 들어본적이 있어요. 그들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막 돌아온 사람이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원했어요.'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지구의 반대편에서 온 사람도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는 경이로운 이야기말고는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오.'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