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누나 한 명, 그리고 동생 두 명으로 5인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농사와 운송업을 하고 있었고, 교회를 직접 지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가세가 기울어져서 서울로 이사했다.
그 후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강영우 박사님은 중학생 때 축구하다 눈에 공을 맞아 망막박리 (망막이 떨어져 영양공급이 안 됨)로 시력을 잃었다.
그 때 눈 치료로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평생 시작장애인으로 살아가야한다고 판정받았다.
어머니는 그 충격때문인지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가장인 누나가 학업을 포기하고 밤낮으로 2년동안 일 한 결과 누나도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이렇게 4년동안 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시력까지 잃었다.
박사님은 시력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만 시력은 그대로였고, 나중에 하나님의 대답이 "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사님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약함 속에서 주의 권능을 들어내시려고" 시력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박사님은 시력 장애를 극복할 이유를 찾고, 맹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시각장애인에게 열린 길은 안마사나 점쟁이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실거라 믿고 열심히 공부했다.
맹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학교에 원서를 넣으러 갔지만, 장애인이라고 거부당했다.
그래서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 교회 혐회의 충무였던 목사님께 의논했고, 입학시험을 볼 기회를 얻었다.
시험 결과, 10등으로 입학 할 수 있었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근소한 차이로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 당시 체육이 필수였는데, 눈이 안 보이니 대신 논문을 제출하라고 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논문을 읽어보기는커녕, 출석부에도 기재하지 않았었다. 그 결과 낙제점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피츠버그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박사님의 신체적 장애는 여권을 수록하는데에도 문제가 되었다.
문교부가 신체 장애를 유학의 결격 사유로 정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박사님은 한미재단의 유학지도부 박사님을 찾아가서, 그 법적 조항을 없애버렸다.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한 박사님은 그 후 루스벨트 재단의 고문이 되어 한국이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상의 첫 수상 국가가 되는데에 큰 힘이 되셨다.
그 후 박사님의 아들의 학교 교장이 자서전을 부시에게 보내보라고 권유해서 보냈더니, 장애인 복지와 인권에 관심이 있던 부시가 편지함으로 부시 가문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 후 국가장애위원회 정책분과위원장, 유엔 장애위원회 부의장, 국제교류교육 재활교류재단을 창설, 국제 로터리 인권상 수상 등 큰 업적을 이루어내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20만 달러 (약 2억 2500만원)를, 두 아들은 각각 2.5만 달러 (약 2800만원)씩 사회에 환원했다.
"진짜 장애는 육체의 장애가 아니라 믿음의 장애"라며, "우리는 누구나 희망의 수혜자"라는 말을 남기셨다.
강영우 박사님의 이야기는 "눈 먼 새의 노래"라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