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1-19
사역자에 대한 비판(직분에 대한 의심, 사역비에 대한 의심)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에, 성경은 바울의 답변(3절)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
‘사도’란 예수님을 만나 그 가르침에 따라 보내심을 받은 제자를 말한다. 그러니 12제자만이 아니라, 72명의 제자들과 엠마오의 제자들, 그리고 당연히 바울도 사도인 것이다(1-2절, 오히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할 게 아니라 보증했어야 했다). 실제로, 넓은 의미로 볼 때 오늘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사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도들은 사역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4-6절). 이 권리는 일반인들도 마땅히 누리고 있는 권리이며(7절), 심지어는 가축들도 이 권리가 율법으로 보장돼( 8-9절) 있을 만큼, 사도가 그 일한 대가를 얻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다(10-14절).
그러나 정작 바울 자신은 그 권리를 포기했다(12절,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왜냐하면, 사역자들의 사역비 남용 사례에 휘말릴 소지를 아예 제거하고 싶었고, 당시의 방랑교사들(연설하고 돈을 받는 직업)처럼 돈 받고 복음을 판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5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에게 이 일은 자랑거리(15절)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16절)고 한다. 이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처럼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강제로 선택되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16절) 수 있는 노예신분(17절,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삯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이 일은 “자랑거리가 아니지만(16절) 바울에게는 자랑스럽다(15절)”는 말이다.
대신, 스스로가 삯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18절, 값없이/생계 걱정 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18절,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권리 이용 안 함/사역비 없이) “자유” 그 자체였다. 다만 그는, 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19절,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을 뿐인데, 그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의 사도가 된 우리들도, 각자의 일터를 놓지 않는 이유가 단지 생계유지를 위한 것만은 아니길 바란다. 스스로가 수고를 자처하여 일터를 통해서 일본인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길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 안에 있는 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상급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성도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될 때,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참된 교회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럴 때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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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하는가, 의무적으로 하는가, 억지로 하는가, 안 하는가?
2) 복음의 복을 누리기 위해 한 주간 무엇을 할 것인가(또는 했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로 여기고 있지만 기쁜마음이긴 하다.
다른이들과 만날때마다 더욱 복음 생각하기!
의무와 억지사이?
복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음의 기쁨이 있다.
주변사람들과의 끈을 놓지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가기!
1
神様が成してくださったキセキは喜びで伝えている
「信じてください」はしていない
2
ママ友・パパ友に遣える
1) 상황과 대상자에 따라 나의 태도와 마음이 바뀌는것같다
2) 사람눈치 보지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