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20
사도행전 12:1-19
1절의 “이 무렵”이란, 베드로가 이단적인 행동(그 당시의 풍조에서)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던 무렵을 말한다(행11:1-18). 이때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1절). 헤롯은 예수쟁이들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처리해 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졌던 것이다. 야고보는 죄명도 없었고, 어떠한 심문도 없었고, 합당한 변호의 기회도 없었고, 재판도 없었다.
야고보는 이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었다(막10:39). 야고보는 그 다짐대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함으로써, 초대 교회가 세워진 이래 가장 첫번째 순교자가 된 것이다.
헤롯은 이제 베드로를 죽이려고 그를 끌고 왔다(3절). 그러나 마침 무교절 기간(사형을 감행할 수 없음)이어서 어쩔 수없이 베드로를 감옥에 넣었으나, 유월절이 끝난 다음날 베드로를 사형시킬 예정이었다(6절). 아마 베드로도 야고보처럼 순교를 반기면서 천국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가 고통없이 주님 곁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5절).
그런데 베드로의 사형일 전날 밤, 갑자기 감옥 문이 열리면서 베드로가 천사의 안내에 따라서 감옥 밖으로 나오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6-10절). 주님이 베드로를 살리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어째서 주님이 야고보는 죽게 놔 두시고 베드로만 살리셨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느냐 사느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주님께 “왜 죽이셨어요(또는 살리셨어요)!”하고 따져 물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보다 죽음 이후 천국의 삶이 더 좋다고 믿는다. 당신은 왜 천국을 소망하는가? 누구나 잘먹고 잘살고 편하게 즐기며 눈물과 고통이 없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가? 근심∙걱정∙눈물이 없는 파라다이스를 바라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살려 주세요”하고 기도하지 않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가 파라다이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왕이면 지금 이 땅에서 파라다이스를 누리고자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과 이 땅의 차이는 “주님의 실체” 여부에 있다.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다른 이유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천국에 가서도 주님과 함께 있지 못한다면, 그곳은 여전히 지옥일 수밖에 없다.
야고보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고, 베드로는 살아서 주님과 함께 동행했다(친히 감옥문을 열어주심). 그러니 이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함께 있는 천국을 누렸던 것이다.
이제 다시 묻는다. 당신은 왜 천국을 소망하는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14:8)”
이것이 내 평생의 고백이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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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천국을 누렸습니까? 어떻게 주님과 동행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