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3.
창세기2:18-3:21
남자와 여자의 창조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다. 유교적 문화배경을 지닌 한국교회는 여자는 남자를 도우며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흔히들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창세기의 돕는 사람/배필 (창2:18), 남자의 갈빗대로 만든 여자(창2:22)가 그 성경적 근거로 여겨진다. 하지만 성경본문을 제대로 상고하면 유교적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성경적 해석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창조의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등장하는 좋지 않았다는 표현이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2:18)라는 구절이다. 남자는 혼자서 완전하지 못하였기에 그를 돕는 존재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돕는다는 표현은 조수의 위치에서 주인을 돕는다는 말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돕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쓰이는 동사가 여기에서 쓰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남자나 여자가 누구의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혼자 있어서는 좋지 않은 존재를 돕기 위해 서로가 존재함을 나타낸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볼 말씀은 이름 붙이기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상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남자는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창2:19-20). 그러나, 남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불렀을까? 남자의 갈빗대로 창조된 여자를 보고 남자는 감격하여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라고 외쳤다. 여기에서 여자를 부르는 히브리어는 잇샤(אִשָּׁה)로 남자 잇쉬(אִישׁ)의 여성형 명사이다. 즉, 남자는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자신과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그야말로 온전하지 못한 자신을 온전하게 하도록 돕는 자신의 뼈요 살과 같은 한 몸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 온전하지 못하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선악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는 서로가 한 몸처럼 서로를 도우며 완전하게 하는 상태이다. 혼자서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적 진리와는 거리가 먼 세상의 거짓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돕듯이 누군가를 돕기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신을 희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회복하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하와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나? 그 이름은 아담이 붙였다. 하지만 그 타이밍에 주목하자. 선악과 사건으로 타락 후에서야 아담은 하와의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상대를 지배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생각할 때, 타락 후에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자 하게 되었고, 이러한 긴장 관계는 오늘에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부부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상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이 또한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타락된 관계의 결과이다. 부부는 상대를 내 몸처럼 사랑하며, 하나님이 나를 돕고, 이스라엘을 돕고, 소외된 자를 돕듯이 상대를 돕도록 하자. 이는 내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를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하게 하며 온전케 하는 일이다. 이러한 서로를 돕는 관계는 부부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공동체에서도 형제 자매와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도록 하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되고, 이것이 곧 선교인으로서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