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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6월 03일
In 말씀&칼럼
2023.6.4.
고린도전서16:1-4
고린도전서의 편지글을 통해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조언을 구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지침을 주는데,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 돕는 헌금(연보)에 대한 내용이다. 연보를 통해 우리는 은혜를 나누는 교회의 전통에 대해서 배우고 우리 삶에도 적용해야 한다.
먼저, 1절에서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고통받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모으는 헌금에 대한 사도바울의 지시는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와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모든 교회에 동일하게 내려진 지침임을 알 수 있다 (고후8:1-5). 공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서로의 어려움을 알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2절에서는 연보를 모으기 위한 지침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수입에 따라 매주 주일마다 얼마씩을 따로 저축할 것을 당부한다. “수입에 따라 (ὅ τι ἐὰν εὐοδῶται)”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번성하시게 하는대로”라는 수동태의 의미를 지닌다. 내게 주어진 수입이 내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쓰고 남는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나보다 더 곤궁한 처지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돕기를 특권으로 여기고 동참하길 원했던 당시 교회들의 모습을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볼 수 있다 (고후8:1-5).
3절에서는 그렇게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이 연보를 “선물”로 표현하고 있다. 선물은 그리스어로 카리스(χάρις)라는 단어로 표현이 되어있는데, 은혜 혹은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뜻이 단어이다. 즉, 매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모아서, 곤궁한 처지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이 연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은혜의 선물을 전달하러 갈 때, 바울이 가는 것이 좋다면 함께 가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주체적인 표현에 주목하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절단을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사도 바울과 함께 갈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라면, 그 어떤 수고도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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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의 적용: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한 주간 주신 은혜(수입)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였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누구에게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고 실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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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5월 22일
In 말씀&칼럼
2023.5.21.
고린도전서 15:1-5
복음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완성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눅10:8-9, 17:20-21). 완전한 평화와 기쁨이 함께 하는 (미4:3-4)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며 (사53), 부활하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 교회는 이를 목격한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의 믿음 위에 세워졌으며 (5절), 우리도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공교회의 멤버들이다.
선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정확한 선포와 함께 복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 드러날 때 이루어진다.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해외의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이기에,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 번 리마인드 하는 복음의 내용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복음 안에 서 있으며, 그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1-2절). 여기에서, 복음 안에 서 있다(ἵστημι, 히스테미)는 말은 힘을 다하여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거짓된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 위에 서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복음을 헛되지 믿지 않는다(εἰκῇ, 에이케)는 말은 목적없이 생각없이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뢰아의 성도들이 말씀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처럼(행17:11), 우리도 진리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결정과 판단이 말씀대로의 것인지 늘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굳게 잡고 있다는 것은, 앞서 복음 안에 서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지만, 이의 완전한 성취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진다 (눅10:8-9, 17:20-21). 이와 같은 영적 긴장 상태에서 우리는 복음을 굳게 잡고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일본인들이 복음을 듣고,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관계를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서의 큰 변화를 의미하기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이 결단이 쉽지 않다. 따라서,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인지 크리스천의 실제 삶을 통해 이를 보여주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완벽한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여러가지 문제와 갈등이 있었지만, 이를 성경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지역 사회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들의 수가 늘어갔다 (행2:44-47, 6:1-7). 우리 일상 가운데 (교회 공동체 혹은 가정에서) 복음이 증거되고 있음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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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의 적용: 우리 삶 가운데 (교회 공동체 혹은 가정에서) 복음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본 넌크리스천의 반응은 어떨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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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5월 12일
In 말씀&칼럼
2023.5.6. 고린도전서 13:1-3 고린도전서12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은사에 대한 편지글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당황해 할 만한 이야기를 13장 서두에서 꺼낸다.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적인 비밀과 지식과 믿음의 은사를 가진 위에 모든 소유를 나눠주고 몸을 바쳐 순교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께도 그 모든 행위들이 칭찬받지 못한다는 이야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공동체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이러한 은사를 지닌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선교 사역을 하는 바울에 대해 동경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폭탄과 같은 선언을 던진다. 사랑..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저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그렇게 다들 막연하게 알고 있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감동적인 묘사가 4절부터 이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감동적이면서 또한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 모든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내 안에 없다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세상에서 받아온 처우를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기만 할 뿐이다. 나의 나 됨을 참아주지 않고, 무례한 말을 쏟아내는 세상에서 다들 상처받은 기억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런 현세에는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소중한 사랑을 무한히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더 주지 못해서 안달인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믿음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에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누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안겨 회복의 시간을 경험해보자.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마음껏 하나님께 표현해보자. 세상은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거부하거나 폄하하거나 무시하거나 비웃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이시다(습3:17). 하나님께 각자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 누리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자. 이는 자녀 된 우리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축복이다. --- [한 주간의 적용] 5가지 사랑의 언어 중 각자의 사랑의 언어로 하나님께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는 한 주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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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4월 15일
In 말씀&칼럼
2023.4.16. 고린도전서 12:8-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알길 원하십니다 (1절).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7절). 그리고, 은사를 주시고, 그를 통해 섬기게 하시며, 섬김을 통해 일의 성과가 나타나게 하시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심을 먼저 기억합시다 (4-6절). 8절부터 계속되는 오늘 본문에서는 다양한 은사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관하여 고린도전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야고보서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살펴봅시다. 먼저, 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누구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약1:5). 그러니 구할 때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약1:6). 이렇게 하나님께 받은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는 너무도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혜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대기업이나 국회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만 들려오지 않습니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약3:16). 반면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7절),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약3:17). 미래 산업을 선도한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기업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혜의 속성이 놀랍지 않나요? 이런 지혜를 가진 리더야말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싶은 훌륭한 리더이겠지요. 하나님으로 이런 지혜를 받은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착한 행동을 하라고 하십니다 (약3:13).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이렇게도 세상의 지혜와 다를까요?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동시에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도 맺게 하십니다 (갈5:22-23). 이런 아름다운 은사들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이, 그리고 나의 모습이 너무 기대되지 않나요? 나에게도 교회를 섬기기 위한 은사를 주시길 사모하며 구하도록 합시다. -- 한 주간의 적용: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해 주시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를 어떻게 섬기길 원하는지 생각해보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은사를 주시길 한 주간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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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4월 01일
In 말씀&칼럼
2023.4.2. 고린도전서12:1-7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도입부에 해당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알기를 바라기에 3장이나 할애하며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1절).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7절). 앞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고전10:23). 즉,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분별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롬1:11-12).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님이시고, 은사를 통해서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이를 주관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는 일의 성과도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4-6절).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조화롭게 협력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이를 통해 교회를 섬기고, 그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 우리도 성령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질서있게 하고, 형제자매의 유익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사랑으로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3절). 이는 입술의 고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니는 이방 사람과 같은 영적으로 무지한 삶을 살았더라도 (2절), 이제는 더욱 주님을 알길 힘쓰자. 주 (Lord)라는 호칭에는 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고백이 담겨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에게는 본래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본래 주 (Lord)라는 호칭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로마의 황제를 그의 백성들이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를 때마다 예수님 만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심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리고, 이 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나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움심을 구하도록 하자. -- 한 주간의 적용: 형제 자매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격려하기 위한 액션을 취하고 나눠보자. (격려를 한 사람과 격려를 받은 사람이 함께 나누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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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3월 18일
In 말씀&칼럼
2023.3.19. 고린도전서 11:2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이유로 고린도교회를 칭찬한다. 먼저, 사도바울을 “모든 면으로 기억”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기억한다는 말은 잊어버렸던 일을 기억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잊지 않도록 항상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경 원문의 그리스어는 밈네스코마이(μιμνῄσκομαι)라는 단어인데, 자신에게 스스로 리마인드 시키며, 주의 깊게 생각하고 배려하고 케어한다는 의미이다.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모든 일에서 기억하여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칭찬한 두 번째 이유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해 준 대로 전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통은 옛날부터 해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반복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원문에서 사용된 전통 (파라도시스 παράδοσις)이라는 단어는 ‘권위에 순종하다/항복하다, 전해져 내려온 가르침의 내용’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에 순종하여 이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의 내용을 지키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이다. 성찬과 세례, 예배의 전통이 이에 해당되며, 이 전통은 우리 교회에서도 지키고 있다. 일본방송국 니혼테레비의 장수 프로그램인 나의 첫 심부름(はじめてのおつかい)은 2-4세의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의 첫 심부름’의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후쿠시마현의 유우토군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크리스천의 삶과 오버랩 된다. 울음을 삼킨채 왕복 4킬로미터의 심부름 길을 오가며 누나의 발표회 연습에 필요한 대본을 전달한 유우토군은 엄마와 누나를 생각하며 수고를 감내하였다. 우리도 복음을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또한,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엄마를 위하는 필사적인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과 심부름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 내내 사와야 할 물건들을 되뇐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보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18:3)이라고 말씀하셨다. --- 한 주간의 적용 •Netflix에서 はじめてのおつかい를 한 편씩 봅시다. •어릴 때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가 했던 일을 생각해보고 한 가지 씩 나눠봅시다. •나의 삶의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나의 첫 심부름을 기억하기 위한 한 주간의 실천사항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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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3월 04일
In 말씀&칼럼
2023.3.5. 고린도전서 10:14-22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문제이다. 연인 사이에 제 3자가 끼어들면 질투하고 화를 내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질투하고 (출20:4-5), 진노하신다 (골3:5-6). 우상숭배의 문제는 각 교회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실까?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게 되며, 참여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하나의 교회가 된다. 우상이나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 대단한 물건이어서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귀신과 친교를 나누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다 (고전10:20).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상은 무엇일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더 의지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즐기고, 더 기뻐하는 것이 모두 우상이다. 돈, 명예, 직장, 자식, 넷플릭스 같은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특히 물질 만능주의의 세태를 볼 때, 돈은 우리 삶에서 우상이 될 수 있는 소지가 크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반대로 돈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이 현대인이 아닌가? 그래서 더 많이 돈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소유한 돈에 따라 사람의 격을 따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사랑하되, 돈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안될까? 응, 안된다. 성경은 분명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6:24)고 말씀하신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고전10:21)라고 말씀하신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우상을 미워하고 업신여기거나 반대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업신여기거나 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과 식탁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귀신과 식탁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지 나 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보다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즐기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업신여기고 미워할 것인가? 그것이 사라진 나의 삶을 묵상하고 실천하자. -- 한 주간의 적용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보다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즐기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업신여기고 미워할 것인가? 그것이 사라진 나의 삶을 묵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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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2월 18일
In 말씀&칼럼
2023. 2. 19. 고린도전서 9:24-27 오늘 본문에서 말씀은 우리의 인생이 달리기 경기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의 삶은 목적이 있으며, 끝이 있고, 경주의 결과에 따라 분명한 상이 주어진다. 과연 우리는 어떤 상을 받게 되며, 또 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가 받을 상은 썩지 않을 월계관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여러 본문에서 우리가 받을 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 어느 본문도 정확한 상의 금전적 가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상을 받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하며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태도를 볼 때 사람의 언어로 억지로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그 가치가 훼손될 정도로 엄청난 상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은 경기를 이기기 위해 운동선수들이 절제를 하듯이 절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킨다고 하였는데,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눈은 멍들게 때릴 정도로 끊임없이/엄격히 훈련시켜서 항복시키고 노예로 만들어 말을 듣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만큼 절제를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거쳐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제대로 절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령의 9번째 열매가 절제인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힘으로 절제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게 하신다. 겸손함으로 매일매일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거룩한 습관이 생기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됨을 기억하자. 혼자서 절제하기 힘든 사람은 반드시 공동체의 기도모임에 참여하도록 하고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자. 또한, 절제하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 알고 절대 잊지 않도록 하자. 성경은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잠25:28). 성벽이 없으면 원수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모든 값진 재물을 약탈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 자유마저 빼앗기게 된다. 사도바울은 또한 절제하지 못하여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 한다고 하였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여 실격되고 쓸모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크리스천 리더는 여러 단계의 성장 단계를 거치며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는데, 각 단계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계속 그 곳에 머물러 거듭된 훈련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은 경주자로서의 삶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절제하며 경주를 완주하여 받을 월계관을 기대하며 소망하자. --- 한 주간 내가 절제하고자 하는 것을 정해보자. 무엇을 절제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받을 월계관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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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2월 04일
In 말씀&칼럼
2022.2.5. 고린도전서9:1-23 사도바울은 먹고 마실 권리, 결혼/성적인 관계를 가질 권리,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을 권리를 포기했다 (4-6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았다 (12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고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으면 세상의 쓰레기와 찌꺼기처럼 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또는 복음 전파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았다 (고전4:11-13). 전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누리는 것을 바울은 마지못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바울은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길 원했고, 그것이 바울의 삯이었다 (15-18절). 또한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19, 22절). 유대인, 이방인,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같은 모든 종류의 사람에 맞추며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바울에게는 바라보는 푯대가 있고,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23절).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매일을 살고 있고,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받은 선교의 사명이 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단지 복음을 믿기만 하는데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우선순위가 삶에 반영된 사람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을 망각하고 내가 누려야 할 권리와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자. ----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였다. 복음을 위해 한 주간 내가 포기하고자 하는 권리와 자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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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3년 1월 14일
In 말씀&칼럼
2023. 1. 15. 고린도전서 8:4-6 타종교나 이단의 우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우선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은 실재하는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4절)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으로 인해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노이즈를 만들어낸다.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재정 문제 등 우리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이 되어 있거나 우상이 될 소지가 있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그 관계를 소홀히 하게 되는 모든 종류의 노이즈가 우상 숭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어떠한 일에 몰두하여 연인을 혼자 버려둔다면 그 어떤 연인이 이를 기꺼워하겠는가? 이에 하나님은 신이 아닌 우상을 신이라고 섬겨서 하나님의 질투에 불을 붙이지 말라고 하시며 (신32:21),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지 말며 (신4:23), 우상들을 부수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신다 (신7:5). 6절에서는 오랜 역사를 거쳐 교회가 이단과 싸우면서까지 지켜 온 소중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이며,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또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우상 숭배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드림으로써 해결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초위에 각자 지어가고 있는 집은 마지막 날에 불로써 평가를 받게 되는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지은 집만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아름답게 빛나게 된다 (고전3:13, 8:1). 이 집은 천국문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지어져 가게 되며,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의 근거가 될 것이다 (고전3:14). -- 한 주간의 적용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해 내가 놓고자 하는 첫 벽돌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한 주간 실천하며 생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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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12월 17일
In 말씀&칼럼
2022.12.18. 고린도전서 8:1-3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절).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덕을 세운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건축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오이코도메오). 앞서 다룬 고린도전서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건물(오이코도메)이며, 우리가 각자 지은 건물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불로써 판단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3장에 나온 건물의 비유와 8장의 덕을 세운다는 내용은 서로 연관되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오늘 8장 본문에서는 3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건물을 사랑으로 지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으로 지은 건물을 통해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되기에 이 건물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 됩니다. 그러하기에 3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매일 두 번씩 암송하며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장 본문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신6:5)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을 인용하여 (마22:37-40)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며, 마찬가지로 중요한 계명이 있는데,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잘못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즉, 자신의 본 모습보다 자신을 부풀려서 생각하게 만들고 (knowledge puffs up), 집을 짓기보다 오히려 집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덕을 세워 하나님을 집을 지어가도록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집을 지어가고 있나요? 그리고, 어떤 집을 지어가고 싶은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누리고, 나누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합시다. --- <한 주간의 적용> •나는 어떤 집을 짓고 싶은가? 나는 어떤 집이 되고 싶은가? 인터넷에서 여러 집의 이미지를 찾아보고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의 이미지를 찾아서 공유하고 왜 그 집이 마음에 드는지 설명해보자. •고전13:4-7에서 한 주간 중점적으로 실천할 사랑의 성질 하나를 고르고 나눠보자.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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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9일
In 말씀&칼럼
2022.11.20. 고린도전서 6:1-11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은 고난은 어쩌다보니 받게 되었다거나 어쩔 수 없이 받은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갔고,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본받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전4:16). 사도바울을 본받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유 없는 고난을 겪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중 1절에서 6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형제들 간에 벌어진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 가져간 것에 대해서 꾸짖고 있다. 소송이라는 것의 본질은 단지 시시비비(是々非々)를 가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에게 이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나 당시의 그리스 로마 법정은 소송에 이기기 위해 뇌물을 쓰고 폭언을 일삼는 변호사를 고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곳이었기에 형제에 대해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심각한 문제였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교회 내에서 중재자를 세워서 문제를 해결할 것과 소송하는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심판날에 예수님과 함께 세상과 천사를 심판하게 될 왕의 상속자들인데 (눅22:28-30, 마19:28), 심판의 날에 다뤄질 문제에 비하면 민사소송 문제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어서 7절에서 8절 말씀에서는 형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서 이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소송을 하는 그 자체가 모두의 실패임을 일 깨우며 차라리 속아주고 불의를 당하라고 한다. 이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이미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고, 십자가를 거부하지도 않으셨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름답게 보시며,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벧전2:19-21). 이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가치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9절에서 11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전에는 불의를 행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인식할 것을 당부한다. 왕의 상속자의 관점을 가지면 오늘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할지 심판날에서 오늘을 역산(逆算)할 수 있다. 공동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따라오는 고난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감내하자 (롬8:17). ----- 고전4:9-13의 바울의 롤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듯 하다.어려워 보인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 간에 일어난 소송도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본성을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에 왕의 상속자로서의 역산을 적용하면 상황이 달라 보인다 (어쩌면 양보 할 수 있을지도?). 나에게 어렵게 여겨지는 일을 한 가지 정하고 이에 대해 한 주간 왕의 역산을 적용해 보자.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우리는 약하나…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고전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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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11월 05일
In 말씀&칼럼
2022.11.06. 고린도전서 4:14-17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훈계의 목적과 훈계를 행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훈계는 잘못된 행동을 멈추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리스 원어인 누세테오(νουθετέω)는 상담, 권고, 경고, 지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로마 교회,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할 것을 당부하고(살전5:14),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라고 했으며(골3:16), 이렇게 서로 권면할 능력이 성도들 가운데 있음을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롬15:14). 즉, 훈계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훈계를 행하는 사도 바울은 직책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정도의 어중간한 마음으로 (15절 본문의 ‘스승’은 당시에 어린이를 보호하고 지도하는 일반적인 관리를 행하는 노예나 수행원에 해당하는 표현임) 고린도 교회를 훈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잘못에서 돌이키기 위한 절실한 심정으로 훈계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롤모델로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16절). 이는 바울이 교만해서가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1:1).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고린도교회로 파송합니다. 디모데가 고린도교회에 파송된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생활방식을 고린도교회에 되새겨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7절). 그리고, 디모데가 고린도까지 직접 와서 되새겨 줄 사도바울의 생활방식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세련된 매너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떠돌아 다니고, 고된 노동을 하며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아 마치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었습니다 (고전4:9-13). 우리가 훈계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서 행하던 잘못된 일을 그만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한 말씀처럼 (말1:11)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날 때 일본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 내가 들은 훈계/권면을 되새기며 한 주간 생활하자. 내가 멈추어야 할 나쁜 행동은 무엇인가? 이를 멈춤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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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10월 15일
In 말씀&칼럼
2022.10.16. 고린도전서 4:1-5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교회의 리더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복음)을 맡은 관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사회상과 사용된 성경의 원어를 통해서 볼 때, 일꾼은 단순한 일용직 인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직원이라는 의미이며, 관리인은 주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은 가운데 주인의 토지를 마치 주인인양 그를 대신해 관리할 권한을 부여 받은 토지관리인을 의미합니다. 아마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역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편지를 읽고 교회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전적인 신뢰에 대해 관리인인 우리는 신실성과 충성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신실성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고전1:9). 불변하시고 자신의 모든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우리의 삶과 교회로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주인이 없는 먼 지방의 땅을 대신해서 관리하라는 전적인 권한을 맡기고 파견할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보다도 신실성입니다. 이러한 주인과 관리인에 대한 확실한 아이덴티티가 있는 사람은 세상과 타인의 판단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자신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리인을 평가할 자격과 권한이 있는 분은 그 관리인을 파견한 주인 밖에 없으며, 내려진 판단이 효력을 지니는 것도 주인이 내린 판단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식하며 살아갑니까? 세상의 시선과 평가보다는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동기를 어떻게 판단하실지만을 생각하기로 결단합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우리가 판단받을 때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고,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5절). 비록 지금은 아무도 우리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를 받을 때도 있지만, 심판 날에 우리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우리가 충성할 대상은 직장의 상사도 아니요, 출세나 명예나 재물도 아닙니다. 우리가 충성하며 우리의 신실성으로 보답할 분은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시며 세상에 대한 대위임령을 우리에게 맡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신뢰를 받고 있는 영역을 하나 골라서 “고대의 관리인에 대한 발령서”를 자신의 언어로 고쳐 써보자. "나는 이 문서를 통해서 너에게 아리시오네에 있는 내 땅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너는 그 곳의 땅을 관리하고, 토지임대료를 징수하며 새로운 임차인에게 땅을 빌려주도록 하라. 필요에 따라 땅을 개간하도록 하고, 내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행하며, 너의 역할에 관련된 모든 비즈니스를 마치 내가 그 곳에 있어서 행하는 것처럼 처리하라. 카라미스의 땅들을 분배하고, 남은 땅들은 내 앞으로 남겨두라. 나는 너의 신실함에 의지하여, 네가 행하는 모든 결정들을 지지하고 컨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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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10월 01일
In 말씀&칼럼
2022.10.02. 고린도전서 3:10-15 오늘 본문은 집을 짓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심판의 날에 크리스천들의 업적이 어떻게 평가받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집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전2:1-2). 이 기초 위에 우리는 집을 짓습니다. 집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리가 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집을 지을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 따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이 집은 불로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금, 은, 보석은 불을 거치며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고, 나무, 풀, 짚은 타버릴 것입니다. 금과 같이 귀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시기에 (계2:23),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느냐에 따라 금과 같은 일이 될 수도, 풀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두 렙돈(100엔 상당)을 헌금하고 예수님께 칭찬 받은 과부와 같을 수도 있고, 땅을 팔아 큰 돈을 헌금하였지만 교회를 속이고 일부를 감추고 거짓말을 하였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숨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을 수도 있습니다. 헌금은 귀한 것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금과 같은 일이 될지 풀과 같은 일이 될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덕으로 생각하는 저축, 시간 아끼기, 정리정돈 같은 일도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동기를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은 최종적이며, 정확하여 모든 것을 드러내고 환히 보여줍니다 (13절). 우리가 천국에 가서 받게 되는 상(보수)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기초 위에 지은 집이 그대로 남으면 상을 받고, 타 버리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두 주간의 설교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고한 만큼 상을 받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2) 선한 마음과 생각으로 한 일에 대해서만 상을 받습니다. 어떤 일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 [한 주간의 적용] -평소 아무 생각없이 행하던 짚과 같은 일을 예수님을 위해 금과 같은 작품으로 바꾼다면 어떤 일일까?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수고를 예수님을 위해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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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9월 17일
In 말씀&칼럼
2022. 9.18. 고린도전서 3:1-4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부터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권면이 시작됩니다. 이 권면을 나와 우리 교회를 향한 권면으로 받도록 합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거듭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육에 속한 사람들이란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18개월을 고린도에서 보내면서 당시 처음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된 고린도의 성도들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2절). 이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이들이 소화할 수 없었기에 기초적인 이야기만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4, 5년이 지나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내는 시점에서도 성장하지 않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리더쉽의 대가인 로버트 클린턴 박사는 교회의 리더가 성장해 갈 때 먼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며 나를 빚어가시는 단계를 거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빚어가시는 단계에서 나를 사용하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이전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을 인간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3절). 인간의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잠시의 유혹에 넘어진 것을 말하지 않고, 삶의 습관이 되어버린 육체의 행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고린도전서 3장과 짝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15가지 육체의 행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갈5:19-21)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이 가운데, 더러움은 지속적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분냄은 고함을 지르는 등 화를 쏟아내는 것을 말하며, 분쟁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합시다. 옛날 옛적에 한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들에 버려져 있는 노래하는 후라이팬을 발견하고 거두어서 등짐에 넣었습니다. 이 후라이팬은 여행 내내 수다를 떨며 주인과 즐겁게 여행을 했고, 주인도 후라이팬을 아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후라이팬으로 요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물로 씻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주인은 본래의 목적대로 후라이팬을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이 후라이팬과 같지는 않습니까?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였습니다 (요일2:18).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육에 속한 상태에서 영에 속한 상태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육에 속한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세상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갈5:19-21, 새번역] 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다툼과 시기와 분냄과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 질투와 술취함과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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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9월 06일
In 말씀&칼럼
2022.9.4. 고린도전서 2:1-5 고린도를 포함한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는 도시들에는 소피스트라는 변론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도시들을 방문하여 세련된 화술과 철학적/논리적 연설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그 만큼 더 높은 수강료를 받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커리어를 쌓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 가운데서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고,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였지만(고전1:22),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 세우길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고전2:2). 고등교육을 받은 사도 바울이 소피스트들처럼 멋진 연설을 했으면 자신과 교회를 더 널리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참다운 능력과 지혜가 어디에서 그 근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능력이 뛰어난 화술이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룰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이세계의 사람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 바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떠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고난을 이겨냈을까?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 그의 비결이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 활약한 가장 파워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 조차도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두려워서 도망하고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기까지 하였다(왕상19:2-4). 그렇다면 우리 삶에 두려움이 닥쳐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세상의 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시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살전1:5-6, 고전2:4). 즉, 우리들 자신이 바로 복음의 증거이자 예수님의 편지인 것이다 (고후3:3). 실제로 우리는 최근에 가진 형제 리트릿을 통해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샘솟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였다. 리트릿에 참석한 형제들의 간증을 통해서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될지언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보여준 좋은 예가 아닐까? 세상의 룰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만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법임을 기억하자! ---- 내가 알지 않기로 (따르지 않기로) 작정한 세상의 룰은 무엇인가? 나의 삶 가운데 혹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뀜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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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8월 20일
In 말씀&칼럼
2022. 8. 21. 고린도전서 1:18-25 오늘 본문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멸망할 자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이를 믿음으로 압니다. 하지만, 멸망할 자들에게는 이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천로역정에서 세속현자는 크리스천을 미혹하여 도덕시의 합법씨를 찾아가도록 설득하지만, 사실은 합법씨의 그의 아들들은 그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마치 세속현자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출세하고, 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세상의 거짓말에 우리도 때때로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타는 시내산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어쩔줄 몰라서 울고 있던 크리스천처럼 세상 가운데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잊지 맙시다. 때로는 잠시 미혹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천성문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과 같이 좁은 문을 통과해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천성문에 이르는 것이 목적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지혜는 처세술과 자기개발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의 능력은 세상적인 지혜나 지위, 돈의 힘을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칙을 따라 쌓은 스펙을 통해 능력이 발휘된다고, 하나님 대신 돈과 명예를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즉,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닫혔던 문들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헬라어 원어인 에클레시아(Ecclesia)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부르시지 않고 교회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한 또 다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엡4:4)라고 하였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의 여정이 오직 천성문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교회로 모인 우리도 이 한 소망을 가지고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과 같이 세상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여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며, 천성문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하나님은 왜 나를 교회로 부르셨을까요? 교회의 형제 자매들과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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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7월 23일
In 말씀&칼럼
2022.7.24. 고린도전서 1:4-9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1년반 동안 사역을 하며 세운 교회인데, 바울은 이 교회를 사랑하여, 고린도를 떠나서도 수차례 동역자와 편지를 보내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문에 해당되는데,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와 나를 향한 편지로 생각하며 말씀을 상고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스토리는 교회 안에서 쓰여져 가고 있고, 우리 교회는 고린도교회와 함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에 감사합니다(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잘나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한 점이 많은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심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교회 공동체 혹은 가정에 부족한 사람이 있을 때 이를 두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을 감사합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롬5:20). 나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나와 형제 자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재림)을 기다리며 흠 없고 튼튼히 세워져 갈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25:13)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과 우리의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할 날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수십 년 안에는 반드시 오고, 그 날이 내일일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날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반면,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날에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마25:1-13). 그렇다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하는 날은 오늘이어야 함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구원의 긴박성이 있습니다. 오늘 나의 스토리도 여기에 연결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튼튼히 세워져 천국을 차지하게 됨을 기억합시다 (행20:32).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9절).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요15:15). 일본에는 손탁(尊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사나 고객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지레짐작해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서 회사내 비효율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잘 나가는 대기업의 임원들도 사장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왕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또한 우리의 스토리가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갑시다! ---- 흠이 없고 튼튼한 교회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립시다. 교회와 나 ㅇㅇㅇ의 스토리는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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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7월 09일
In 말씀&칼럼
2022.7.10. 사도행전 28:17-28 로마에 도착하여 황제 앞에 서기 전까지 가택 연금된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항상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늘 회당을 먼저 찾아가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로마에서는 연금된 상태여서 자신이 가지 못하자 반대로 유명인(?)의 이점을 살려 유대인들을 초대하였다. 너무나 한결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에 모였고,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바울이 하루를 들여 설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행28:20)이자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는 창조주의 선언이다.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던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며, 그 왕이 우리에게 보내는 새로운 삶/생명의 삶으로의 초대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4-15)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단지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옛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이 또한 새로운 삶/생명의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음에 대한 열띤 토론을 거친 뒤,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이자 왕의 초대를 접한 사람의 반응치고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지근한 반응 아닌가? 이에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마음과 귀와 눈은 열려있는가? 우리는 복음의 풍성함을 믿고, 누리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 •내 삶 가운데 어떤 문제가 해결되길 원하나요? •위의 문제 가운데 세상의 규칙을 따라 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바꾸길 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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