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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10월 01일
In 말씀&칼럼
2022.10.02. 고린도전서 3:10-15 오늘 본문은 집을 짓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심판의 날에 크리스천들의 업적이 어떻게 평가받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집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전2:1-2). 이 기초 위에 우리는 집을 짓습니다. 집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리가 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집을 지을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 따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이 집은 불로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금, 은, 보석은 불을 거치며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고, 나무, 풀, 짚은 타버릴 것입니다. 금과 같이 귀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시기에 (계2:23),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느냐에 따라 금과 같은 일이 될 수도, 풀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두 렙돈(100엔 상당)을 헌금하고 예수님께 칭찬 받은 과부와 같을 수도 있고, 땅을 팔아 큰 돈을 헌금하였지만 교회를 속이고 일부를 감추고 거짓말을 하였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숨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을 수도 있습니다. 헌금은 귀한 것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금과 같은 일이 될지 풀과 같은 일이 될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덕으로 생각하는 저축, 시간 아끼기, 정리정돈 같은 일도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동기를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은 최종적이며, 정확하여 모든 것을 드러내고 환히 보여줍니다 (13절). 우리가 천국에 가서 받게 되는 상(보수)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기초 위에 지은 집이 그대로 남으면 상을 받고, 타 버리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두 주간의 설교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고한 만큼 상을 받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2) 선한 마음과 생각으로 한 일에 대해서만 상을 받습니다. 어떤 일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 [한 주간의 적용] -평소 아무 생각없이 행하던 짚과 같은 일을 예수님을 위해 금과 같은 작품으로 바꾼다면 어떤 일일까?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수고를 예수님을 위해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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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9월 17일
In 말씀&칼럼
2022. 9.18. 고린도전서 3:1-4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부터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권면이 시작됩니다. 이 권면을 나와 우리 교회를 향한 권면으로 받도록 합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거듭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육에 속한 사람들이란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18개월을 고린도에서 보내면서 당시 처음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된 고린도의 성도들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2절). 이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이들이 소화할 수 없었기에 기초적인 이야기만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4, 5년이 지나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내는 시점에서도 성장하지 않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리더쉽의 대가인 로버트 클린턴 박사는 교회의 리더가 성장해 갈 때 먼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며 나를 빚어가시는 단계를 거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빚어가시는 단계에서 나를 사용하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이전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을 인간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3절). 인간의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잠시의 유혹에 넘어진 것을 말하지 않고, 삶의 습관이 되어버린 육체의 행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고린도전서 3장과 짝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15가지 육체의 행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갈5:19-21)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이 가운데, 더러움은 지속적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분냄은 고함을 지르는 등 화를 쏟아내는 것을 말하며, 분쟁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합시다. 옛날 옛적에 한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들에 버려져 있는 노래하는 후라이팬을 발견하고 거두어서 등짐에 넣었습니다. 이 후라이팬은 여행 내내 수다를 떨며 주인과 즐겁게 여행을 했고, 주인도 후라이팬을 아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후라이팬으로 요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물로 씻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주인은 본래의 목적대로 후라이팬을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이 후라이팬과 같지는 않습니까?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였습니다 (요일2:18).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육에 속한 상태에서 영에 속한 상태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육에 속한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세상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갈5:19-21, 새번역] 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다툼과 시기와 분냄과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 질투와 술취함과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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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9월 06일
In 말씀&칼럼
2022.9.4. 고린도전서 2:1-5 고린도를 포함한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는 도시들에는 소피스트라는 변론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도시들을 방문하여 세련된 화술과 철학적/논리적 연설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그 만큼 더 높은 수강료를 받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커리어를 쌓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 가운데서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고,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였지만(고전1:22),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 세우길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고전2:2). 고등교육을 받은 사도 바울이 소피스트들처럼 멋진 연설을 했으면 자신과 교회를 더 널리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참다운 능력과 지혜가 어디에서 그 근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능력이 뛰어난 화술이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룰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이세계의 사람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 바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떠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고난을 이겨냈을까?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 그의 비결이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 활약한 가장 파워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 조차도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두려워서 도망하고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기까지 하였다(왕상19:2-4). 그렇다면 우리 삶에 두려움이 닥쳐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세상의 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시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살전1:5-6, 고전2:4). 즉, 우리들 자신이 바로 복음의 증거이자 예수님의 편지인 것이다 (고후3:3). 실제로 우리는 최근에 가진 형제 리트릿을 통해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샘솟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였다. 리트릿에 참석한 형제들의 간증을 통해서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될지언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보여준 좋은 예가 아닐까? 세상의 룰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만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법임을 기억하자! ---- 내가 알지 않기로 (따르지 않기로) 작정한 세상의 룰은 무엇인가? 나의 삶 가운데 혹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뀜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주일말씀]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기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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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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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21. 고린도전서 1:18-25 오늘 본문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멸망할 자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이를 믿음으로 압니다. 하지만, 멸망할 자들에게는 이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천로역정에서 세속현자는 크리스천을 미혹하여 도덕시의 합법씨를 찾아가도록 설득하지만, 사실은 합법씨의 그의 아들들은 그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마치 세속현자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출세하고, 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세상의 거짓말에 우리도 때때로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타는 시내산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어쩔줄 몰라서 울고 있던 크리스천처럼 세상 가운데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잊지 맙시다. 때로는 잠시 미혹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천성문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과 같이 좁은 문을 통과해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천성문에 이르는 것이 목적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지혜는 처세술과 자기개발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의 능력은 세상적인 지혜나 지위, 돈의 힘을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칙을 따라 쌓은 스펙을 통해 능력이 발휘된다고, 하나님 대신 돈과 명예를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즉,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닫혔던 문들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헬라어 원어인 에클레시아(Ecclesia)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부르시지 않고 교회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한 또 다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엡4:4)라고 하였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의 여정이 오직 천성문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교회로 모인 우리도 이 한 소망을 가지고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과 같이 세상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여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며, 천성문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하나님은 왜 나를 교회로 부르셨을까요? 교회의 형제 자매들과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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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7월 23일
In 말씀&칼럼
2022.7.24. 고린도전서 1:4-9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1년반 동안 사역을 하며 세운 교회인데, 바울은 이 교회를 사랑하여, 고린도를 떠나서도 수차례 동역자와 편지를 보내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문에 해당되는데,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와 나를 향한 편지로 생각하며 말씀을 상고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스토리는 교회 안에서 쓰여져 가고 있고, 우리 교회는 고린도교회와 함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에 감사합니다(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잘나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한 점이 많은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심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교회 공동체 혹은 가정에 부족한 사람이 있을 때 이를 두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을 감사합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롬5:20). 나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나와 형제 자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재림)을 기다리며 흠 없고 튼튼히 세워져 갈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25:13)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과 우리의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할 날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수십 년 안에는 반드시 오고, 그 날이 내일일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날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반면,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날에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마25:1-13). 그렇다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하는 날은 오늘이어야 함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구원의 긴박성이 있습니다. 오늘 나의 스토리도 여기에 연결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튼튼히 세워져 천국을 차지하게 됨을 기억합시다 (행20:32).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9절).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요15:15). 일본에는 손탁(尊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사나 고객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지레짐작해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서 회사내 비효율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잘 나가는 대기업의 임원들도 사장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왕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또한 우리의 스토리가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갑시다! ---- 흠이 없고 튼튼한 교회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립시다. 교회와 나 ㅇㅇㅇ의 스토리는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주일말씀] 흠 없고 튼튼한 교회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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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7월 09일
In 말씀&칼럼
2022.7.10. 사도행전 28:17-28 로마에 도착하여 황제 앞에 서기 전까지 가택 연금된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항상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늘 회당을 먼저 찾아가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로마에서는 연금된 상태여서 자신이 가지 못하자 반대로 유명인(?)의 이점을 살려 유대인들을 초대하였다. 너무나 한결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에 모였고,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바울이 하루를 들여 설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행28:20)이자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는 창조주의 선언이다.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던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며, 그 왕이 우리에게 보내는 새로운 삶/생명의 삶으로의 초대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4-15)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단지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옛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이 또한 새로운 삶/생명의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음에 대한 열띤 토론을 거친 뒤,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이자 왕의 초대를 접한 사람의 반응치고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지근한 반응 아닌가? 이에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마음과 귀와 눈은 열려있는가? 우리는 복음의 풍성함을 믿고, 누리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 •내 삶 가운데 어떤 문제가 해결되길 원하나요? •위의 문제 가운데 세상의 규칙을 따라 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바꾸길 원하나요?
[주일말씀] 복음대로 살기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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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6월 25일
In 말씀&칼럼
2022.6.26. 사도행전 28:1-10 배가 난파한 가운데서도 바울과 함께 같은 배에 탄 일행은 모두 안전하게 몰타섬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고치셨다. 독사에 물린 바울을 고치셨고, 추장 보블리오의 아버지와 그 섬의 모든 아픈 사람들을 고치셨다. 하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은 몰타에서 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게 하는 고치시는 사역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고치길 원하신다. 육신의 질병 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아픔도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는 우리가 고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길 두려워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일과 주변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일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함께 포기해 버리지는 않는가? 우리가 복음의 감격을 누리고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은 우리의 삶 가운데 정직하고 용감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과 함께 찾아가는 것은, 포기해 버렸던 우리의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며, 눈이 멀고, 귀가 안들리고, 말이 안나오는 장애를 극복해 가는 여정이다. 예수님은 달리다굼!하고 소녀를 일으키신 것처럼, 무덤의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일어나라고 하신다. 보블리오가 가지고 있던 인생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는 하나님을 만나 그 해답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추장이었던 보블리오는 이후 교회의 리더가 되어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 순교하였고, 그 신앙이 지금도 내려오는 몰타는 서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우리도 정직하고 용기있게, 그리고 민감하게 질문하자.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혹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면 왜일까? 우리의 부르심은 한 번의 대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여야 함을 잊지 말자. --- 보블리오가 얻은 질문의 해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나의 인생의 질문과 해답은 무엇인가요? 28:1-10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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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6월 11일
In 말씀&칼럼
2022.06.12. 사도행전 27:1-24 가이사랴에서의 2년간의 구류 뒤에 드디어 바울의 로마행이 결정되었다(행27:1). 그러나, 이 여정은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는 크레타 섬에서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 14일간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나 배만 잃을 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바울에게 맡겨 살게 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행27:22-24). 1.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구류를 마친 바울이 태풍을 겪었듯이 우리의 삶은 재난과 변화의 연속이다. 우리 삶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다음 스테이지로 들어서더라도 그것이 평안한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상태로 나아갈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하지 않으면 곧잘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 부왕(父王)의 명을 받아 추수를 감독하러 들판에 나간 왕자가 “내가 여기 뭐하러 왔더라?”하면서 언덕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되지 않은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를 향한 부르심이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하자. 2.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스토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크리스천의 삶에 우연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이해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열쇠는 예수님께 있다. 암호키가 없으면 인코딩 된 문서를 읽을 수 없듯이 예수님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지 않고,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기쁠 때만 감사하고, 환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상한 삶을 살게 된다. 3. 감사의 근원을 기억하기 우리는 작은 것을 잃으면 불평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면 모든 것을 잃고도 새로운 생명을 주심에 감사하게 된다. 바울의 여정에 함께 한 로마병사들과 선원들은 순풍이 불지 않아 여정이 길어짐에 불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풍 가운데 모든 수하물을 잃고 타고 있던 배마저 부서져 나갔을 때는, 그 재난 가운데 생명을 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았겠는가?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이는 세상의 어떤 권세와 환난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 값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결국 우리는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하자. 범사에 감사하자.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한 가지씩 결단 혹은 실천한 뒤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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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2022년 5월 21일
In 말씀&칼럼
2022.5.22. 사도행전 25:13-27 산헤드린 공회와 함께 사도바울을 신문한 베스도 총독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런 죄도 없는 바울을 이대로 로마황제에게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임자인 벨릭스 총독이 2년 동안 구류해둔 바울을 이 이상 구류해 둘 수도 없었다. 그 때 마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신임 총독인 베스도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온다. 이에 베스도는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의 도움을 받아 바울을 신문하고, 황제에게 써 올릴 자료를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그립바 왕과 함께 바울을 신문하기로 한다. 로마황제에게 바울을 보내며 일목요연한 보고를 올리고자 하는 베스도 총독의 생각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고한 바울의 죄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려고 무리한 노력을 하는 것보다 바울을 석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선한 일인 것이다. 베스도는 힘이 있고 자신의 인사권을 쥔 로마황제는 의식하되 그렇지 못해 보이는 사도바울은 무시했다.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은 베스도만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면 반드시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선택을 하게 된다. 베스도의 선임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로마황제보다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로마 제국에 반해 역모를 꾀하다가 투옥된 사람조차도 뇌물을 주면 석방해 주었고, 사도바울로부터도 뇌물을 받고자 2년간 가둬두고 때때로 불러내어 뇌물을 바칠 것을 종용하였다. 반면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의식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2년이나 자신을 구류해두고 있던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해서 당당히 가르쳤으며, 권위를 부려야 할 벨릭스 총독은 반대로 두려움에 떨었다.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이면에 실존하는 영적인 세계의 위상이 반대로 나타난 흥미로운 예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마10:32-33)라고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조차도 두려움에 빠져 하녀를 의식한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베드로가 겪었던 극심한 두려움의 순간이나 혹은 사도바울에게 다가온 유혹의 순간에도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깨어서 할 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천국의 시민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자. --- 내가 평소에 가장 의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을 의식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더 의식하기 위한 한 주간의 실천 사항은 무엇인가?
[주일말씀] 누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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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yu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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