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22.
사도행전 25:13-27
산헤드린 공회와 함께 사도바울을 신문한 베스도 총독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런 죄도 없는 바울을 이대로 로마황제에게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임자인 벨릭스 총독이 2년 동안 구류해둔 바울을 이 이상 구류해 둘 수도 없었다. 그 때 마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신임 총독인 베스도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온다. 이에 베스도는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의 도움을 받아 바울을 신문하고, 황제에게 써 올릴 자료를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그립바 왕과 함께 바울을 신문하기로 한다.
로마황제에게 바울을 보내며 일목요연한 보고를 올리고자 하는 베스도 총독의 생각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고한 바울의 죄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려고 무리한 노력을 하는 것보다 바울을 석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선한 일인 것이다. 베스도는 힘이 있고 자신의 인사권을 쥔 로마황제는 의식하되 그렇지 못해 보이는 사도바울은 무시했다.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은 베스도만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면 반드시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선택을 하게 된다. 베스도의 선임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로마황제보다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로마 제국에 반해 역모를 꾀하다가 투옥된 사람조차도 뇌물을 주면 석방해 주었고, 사도바울로부터도 뇌물을 받고자 2년간 가둬두고 때때로 불러내어 뇌물을 바칠 것을 종용하였다.
반면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의식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2년이나 자신을 구류해두고 있던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해서 당당히 가르쳤으며, 권위를 부려야 할 벨릭스 총독은 반대로 두려움에 떨었다.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이면에 실존하는 영적인 세계의 위상이 반대로 나타난 흥미로운 예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마10:32-33)라고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조차도 두려움에 빠져 하녀를 의식한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베드로가 겪었던 극심한 두려움의 순간이나 혹은 사도바울에게 다가온 유혹의 순간에도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깨어서 할 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천국의 시민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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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소에 가장 의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을 의식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더 의식하기 위한 한 주간의 실천 사항은 무엇인가?
회사 팀 동료 매순간 순간 그들을 도울수 있는주님의 지혜와 그들을 섬길수 있는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기도로 구함.
아내
자신을 중심으로 아내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일본인 일본어
직장동료, 상사 일 시작전에 기도/말씀 시간 반드시 지키기 자신감을 가지고 발언하기
아내 나와 내가 속한 가정,나와 아내와의 관계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ママ友 기도하고 만나기!
仕事先のチーム員 チーム員と比較して仕事に取り掛かるのではなく、神様が何のために私を遣わされたかに集中す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