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
고린도전서 6:1-11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은 고난은 어쩌다보니 받게 되었다거나 어쩔 수 없이 받은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갔고,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본받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전4:16). 사도바울을 본받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유 없는 고난을 겪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중 1절에서 6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형제들 간에 벌어진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 가져간 것에 대해서 꾸짖고 있다. 소송이라는 것의 본질은 단지 시시비비(是々非々)를 가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에게 이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나 당시의 그리스 로마 법정은 소송에 이기기 위해 뇌물을 쓰고 폭언을 일삼는 변호사를 고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곳이었기에 형제에 대해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심각한 문제였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교회 내에서 중재자를 세워서 문제를 해결할 것과 소송하는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심판날에 예수님과 함께 세상과 천사를 심판하게 될 왕의 상속자들인데 (눅22:28-30, 마19:28), 심판의 날에 다뤄질 문제에 비하면 민사소송 문제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어서 7절에서 8절 말씀에서는 형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서 이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소송을 하는 그 자체가 모두의 실패임을 일 깨우며 차라리 속아주고 불의를 당하라고 한다. 이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이미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고, 십자가를 거부하지도 않으셨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름답게 보시며,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벧전2:19-21). 이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가치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9절에서 11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전에는 불의를 행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인식할 것을 당부한다. 왕의 상속자의 관점을 가지면 오늘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할지 심판날에서 오늘을 역산(逆算)할 수 있다. 공동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따라오는 고난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감내하자 (롬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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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4:9-13의 바울의 롤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듯 하다.어려워 보인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 간에 일어난 소송도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본성을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에 왕의 상속자로서의 역산을 적용하면 상황이 달라 보인다 (어쩌면 양보 할 수 있을지도?). 나에게 어렵게 여겨지는 일을 한 가지 정하고 이에 대해 한 주간 왕의 역산을 적용해 보자.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우리는 약하나…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고전4:9-13)
競走者として走り続けること →仕事 →与えられた時間の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