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은 누구인가
그는 세계교회가 흠모하는 대표적인 순교자 중의 한분이며, 그분은 순교 뿐만 아니라 삶의 한순간순간마다 장면마다 성경말씀대로 사신 분이셨다.
손양원목사님은 7살때 처음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되었고 부모님의 신앙 또한 대단하신 분들 이었다.
손양원 목사님이 살던 시대는 대한제국으로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계속 어두운 손을 뻗치고 있었고 그가 9살 되던해에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일제 식민지가 시작 되었다. 이때 교회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힘썼는데 교회의 단합된 모습에 놀란 일본은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지지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을 개조해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신사참배와 매일 아침 일본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하며 수업을 시작하여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명백한 우상숭배였기에 어린나이의 손양원(13세)은 절대 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퇴학을 당한 손양원을 아버지는 오히려 이런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더욱 큰 일꾼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손양원에게는 학교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였고 얼마 후, 손양원을 퇴학시킨 일본 교장이 다른곳으로 전근을 가게 되고 그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게 된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손양원은 (18세) 혼자 중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만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나 주일에 일 할 수 없다고 하자 만두가게에서도 잘리고 또한 학교에서도 손양원의 아버지가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퇴학당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을 잘 알고 이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거기서도 그는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하며 많은 괴롭힘을 당하지만 주님만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버텨나갔으며 2명의 신앙멘토(간조 선생님과 나카다 목사님) 를 만나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고 조선땅으로 돌아가 우리민족을 전도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일본유학을 통해 사명을 깨달은 그는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경남선교학교에 입학하고 주기철 목사님을 만나 간증과 설교와 강의를 통해 그에게 "순교적 신앙"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된다. 우연한 기회로 한센인(나병) 환자들이 모여있는 치료소로 설교를 하러 가게 되면서 모두가 꺼려하는 그곳에서 오히려 본인이 한센병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한센인들을 위해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섬겼다. 처음에 마음을 닫았던 한센인들도 손양원의 진심에 모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편 이시기에 일본의 조선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강요문제는 극에 달해 있었고 찬성과 반대속에 혼돈을 겪던 한국교회(조선예수교회장로회) 는 신사참배가 죄가 아님을 선포하고 신상참배를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손양원은 신사참배는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 주장하며 반대운동도 함께 전개해 나갔다. 그의 첫째 아들 동인도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결국 손양원은 신사참배 거부 죄로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 받는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응원한다. 그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절대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감옥안의 사람들과 나아가 일본 간수들에게 까지 복음을 전하며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였다. .5년 뒤 사상전환을 하면 풀어주겠다는 일본에게 전향을 거부하여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오직 순교할 수 있기를 주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의 소금물 고문을 당하는 날, 손양원은 오히려 담대하게 나아갔고 이상하게 물고문은 취소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나라는 해방 되었고 그가 몸 담았던 한센인 센터 여수의 애양원으로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3월 손양원은 해방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갈등이 사라져 전도사 신분 20년만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러나 행복했던 것도 잠시 여순사건이 터지며 남한과 북한의 대립으로 당시 공산 진영은 우리 사회를 공산화하려고 나라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그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의 군인들 중 좌익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일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이때 손양원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도 같은 학교의 좌익 학생에게 예수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두 아들의 사망소식에 손양원은 아이들의 순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본인의 아들을 죽인 학생을 회개 시켜 아들삼으려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학생을 오히려 자신의 양자로 삼는다. 손양원 목사님의 인품에 감동한 김구 선생은 몇차례나 전화로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맡아달라고 하지만 애양원에 남기 위해 거절한다.
여순사건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고 서울에 있던 사람들과 목사님들도 남쪽으로 피난갔지만 애양원에 남아 피난가지 못하는 한센인들을 돌보며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하루하루를 마지막 설교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타락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에 대해 슬퍼한다. 그는 결국 인민군 처소로 끌려가 20일동안 온갖 고문과 회유에 시달리다 남한국군의 서울 탈환 소식과 함께 퇴각을 결정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된다. 이때 함께 사살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여수 미평의 과수원에서 순교한다.
느낀점 : 국사시간에 들었던 역사 수업에서는 한국광복을 위해 일한 이들의 대부분이기독교인이라는 설명이 전혀 없었기에 그저 사명감이 뛰어나고 국민의식이 높은 사람들이 광복을 위해 힘썼다고 생각했었다. 이 들 중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해본적 조차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그들이 기독교인이 었기에 오히려 그러한 사명감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손양원 목사님이 살았던 너무나 암울하고 힘든 시대에서 가장 핵심은 하나님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우상숭배가 아니었나 싶다. 손양원 목사님은 우상숭배와 평생을 싸웠던 것이다. 이 때의 삶은 철저한 광야속에 있었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의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삶을 살아야 했던것 같다.
종교의 자유화가 된 지금 우리는 믿음을.. 교회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받쳐서 지켜온 믿음인데 이렇게 편한 삶을 누리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함에 반성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신 분도 이분이 아닌가 싶다
한센인 센터에서 설교하면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걸 알기에 자신을 죽이고 사랑했던 그 분의 삶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거 같다.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한 지금같은 현실에 우리 기독교인이 더욱 힘써 남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사님의 인생은 순교를 향한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계신데 사실 이부분은 잘 와닿지 않았다.
물론 주의 이름으로 죽는것도 엄청난 영광이라고 하시지만... 어떤 일이 있을때마다 이제 순교할 수 있겠다는 부분이 몇번 있는데 ..아직은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믿음의 깊이가 깊지 않은 것같다. 순교도 영광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게 더 좋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순교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고, 한센병 환자와 함께 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누가 감히 따라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저 그분의 흉내라도 내 보는 것이 큰 영광일 것 같다...